하늘에 심겨진 꽃

레몬 - 권여선 본문

길 위에서/책과 마주하다

레몬 - 권여선

사랑스러운_ 2019. 4. 16. 19:16

제목과 책 앞 표지만 보아도 상큼함이 떠오른다.
그래서 얼마나 상큼할까? 상큼함을 내심 기대하고 펼친 첫 챕터부터 '아! 잘못 짚었구나!' 싶었다.
한 소녀의 죽음으로 인한 상황을 풀어내는데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놓을 수 없다. 또한 몰라서 앞 페이지를 들썩이는 것이 아니라 다시 그 상황을 들여다보고 싶어서 책장을 앞으로 넘기게 된다. 단순한 소시오패스적인 소설이 아니다. 공감을 끌어내고, 삶을 돌아보며 자문하게 하는 소설이다. 
 
죽음은 끝을 가지고 온다. 그런데 죽음으로 인해 시작된 이들의 삶이 있다. 시작이라고 하기보다는 그 전의 삶이 무차별적으로 엎질러졌다고 생각하는 편이 맞겠다. 부활한 것도 아닌데 죽음으로 인해 생긴 시너지는 어마하게 부정적이다. 가까운 주변의 죽음으로 인해 그저 내 삶을 돌아보는 것 이상으로 파괴되고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짓눌리고 살아가는 이들이 여기 있다.  
 
챕터 별로 화자가 다르다. (물론 같은 챕터도 있다.) 한 사건으로 인하여 각 화자들은 자신이 경험하고 잃어버린 시간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한 소녀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 자살이든 타살이든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하여 죽음 전의 상황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물론, 죽은 자는 끝일 수 있으나) 죽음 이후 타인이 겪게 되는 삶이 고통과 불안과 번민의 연속을 가지고 온다.
개인이 그려온 삶의 모습과는 달리 불현듯 발생한 한 사건으로 인하여 그것에 여전히 발목잡혀 사는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가.
잃어버린 것이 내 불찰도 내 선택도 아니라는 각 화자들. 누구 하나 딱 말할 이 없는 모든 상황이 자신의 삶을 없애고 잃어버리게 했다는 것에 마음이 아려온다. 망했다고 생각할 때, 틈을 깨고 나온 다언의 행보가 주목된다. 긴 시간 원망하고 자신의 삶이 자신이 아닌 것처럼 살아온 다언의 시간을 보상받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 이를 풀어내는 권여선 작가의 문장이 참 많이 따스하다. 단어 선택과 조합이 탁월하다. 가득 비극적인 상황을 각 화자의 관점에 맞게 구체적이고 이성적이게 풀어가면서도 각 화자의 세포 하나하나에서 뿜어져 나오는 다양한 감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또박또박하게 풀어간다. 이렇게 읽은 이의 감성을 툭 건드린다. 심금을 울린다. 또, 과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과학적 용어를 문학에 적절하게 사용한 것이 참으로 공감을 일으키는 단어 선택이었다. 놀랍다. 그녀의 문장은 챕터1에서 이야기하는 상상력과 같이 해언의 죽음에 나도 3자가 되어 들여다보고 있는 생동감과 박진감을 준다.
 
+
내가 이 삶을 원한 적은 없지만, 그러나, 선택한 적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름다움이 나를 향해 활짝, 그야말로 공중에서 낙하산이 펴지듯 활짝 펼쳐졌던 것이다.
다언에게는 그런 힘이 있었다. 비현실적이고 압도적이며 차갑기까지 한 해언의 아름다움을 우리 쪽 현실로 끌어내려 웃음 속에 용해시키는 생생하고 발랄하고 따스한 힘이.
평소와 달리 웃음과 고함의 파문은 널리 퍼져나가는 대신 그대로 응결되어버렸다.
다언만이 뭔가를 일어버린 게 아니었다. 나 또한 뭔가를 일어버렸다. 오히려 더 치명적인 쪽은 나일 수 있었다.
 
그 해에 일어난 끔직한 사건이 결코 그녀에게서 끝나지 않으리라는 사실뿐이다. 끝없이 계속되리라는 사실뿐이다. 끔찍한 무엇을 멈출 수 없다는 것, 그 무엇이 끝없이 진행된다는 것, 그게 한 인간의 삶에서 어떤 무게일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나는 내 시점을 알지 못한다.
우는 게 누구인지 모르면서 울었다. 앞으로 내가 누구로 살게 될지 모르면서 울었다. 휴지를 뜯어 눈물을 닦았다. 누군가 봄을 잃은 줄도 모르고 잃었듯이 나는 내 삶을 잃은 줄도 모르고 잃었다.



본 서평은 창비의 따스한 손길에 의해 가제본 도서를 받고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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