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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심겨진 꽃
히브리서 1장 본문
1-2 하나님께서 옛날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으나,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7 천사들에 관해서는 성경에 이르기를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바람으로 삼으시고, 시중꾼들을 불꽃으로 삼으신다." 하였고,
8-12 아들에 관해서는 성경에 이르기를 "하나님, 주님의 보좌는 영원무궁하며, 공의의 막대기는 곧 주님의 왕권입니다. 주님께서는 정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곧 주님의 하나님께서는 주님께 즐거움의 기름을 부으셔서, 주님을 주님의 동료들 위에 높이 올리셨습니다." 하였습니다. 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태초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하늘은 주님의 손으로 지으신 것입니다. 그것들은 없어질지라도, 주님께서는 영원히 존재하십니다. 그것들은 다 옷처럼 낡을 것이요, 주님께서는 그것들을 두루마기처럼 말아 치우실 것이며, 그것들이 다 옷처럼 변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언제나 같으시고, 주님의 세월은 끝남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 역할을 하던 천사들과의 차이를 구약의 기록을 근거로 말하고 있다. 시중드는 천사들과 아들이신 예수님을 비교? 비교자체가 안된다. 그냥 단순히 위에서부터 온 분이 아닌 것이다. 뭐 진짜 절대 대체불가, 예수님은 어나더레벨이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아들, 이 아들을 세상의 주인, 하나님의 본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만물을 보존하고 창조하신 분, 우리 죄를 속량하시고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신 분, 그래서 계속 역사하시는 분으로 소개한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죽기까지 순종한 아들은 결국 하나님의 공의하심으로 가장 귀하고 높은 곳에 앉으셔서 지금도 우리를 살피고 있으시다.
우리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이 땅에 가장 작은, 낮은 자로 성육신하셔서 십자가의 조롱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은 아들. 이 아들의 부활로 소망이 생겼고, 이분이야말로 그리스도라는 것을 뒤늦게 혹은 그 역사 후에 알고 신앙하였지만 여전히 변함없이 세상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반복되는 일상 앞에서 흔들린다. 정말 이 분이 나의 구원자가 맞으신가. 라는 고민과 갈등으로 흔들리던 시대였단다. 지금과 다를 바없이.
물질이 나를 풍요롭게 하는 것 같은 시대의 흐름이지만 그것이 절대 우리를 풍요롭게 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시대 속에 살고 있다. 그 공허함으로 신기하게 나의 존재를 다시 돌아보게 되고, 신을 찾게 된다. 갈구한다. 근거도 없이 믿음도 없이 그냥 막연하게. 개인의 채움을 위해 애를 쓰지만 그 목적과 방향이 기독교 가치와는 다르기에 당연히 개인의 필요가 쉽사리 채워지지 않아서 떠나고 돌아옴을 반복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추구해야하는 것일까. 예수님이 소개되는 이 1장에서 세 가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1. 나는 예수님을 어떻게 고백하고 신뢰하며 나의 주라 일컫고 있는가?
죄의 노예가 되어 죽음의 길을 걷고 있는 것만 같으나 그럼에도 여전히 예수가 나를 대신하여 이미 구속해주셨기에 나는 비루하지만 생명의 길 위에 있음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나는 죄가 아니라 주께 속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리고 십자가 단 한 번의 역사로 마무리 하신 게 아니라 여전히 하늘 보좌 우편에서 날 위해 끊임없이 중보하고 있으신 살아계신 주님이시다. 그 주님이 나의 주님이시기에 평안할 수 밖에.
2. 나의 예수님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사셨는가?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르게 사셨다. (물론, 말씀이 육신이되신 하나님이시니 당연하다.) 죽기까지 끝까지 하나님 앞에 순종했다. 그 끝에 하나님은 아들을 가장 영광스럽게 하셨다.
3. 예수님을 나의 주라 말하는 나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내 주님으로 인해 평화와 안식만 누리며 안일하게 내 배만 두들기며 있어서는 안된다. 그렇기에 공동체에서 하나님을 바르게 신앙하는 것을 말하지만, 나는 여전히 내 배만 뚠뚠하게 채우고 있는 아이러니한 반전의 모습을 갖고 있다. 삶이 죽어있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 반복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내가 잘못 가고 있다는 걸 자각한다. 그래서 다시 돌아오려고 발버둥치려한다. 요즘 나는 반응 속도가 상당히 느리다. 하나님 앞에 있는 시간이 현저히 적은 탓이다. 이젠 다시 돌아가 매순간 즉각적인 반응이 내게 있길 바란다. 나의 주님, 나의 사랑하는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듯 나도 하나님 앞에 교만하지 않은 순종이 필요하다. 요즘 나는 무슨 배짱인지 하나님 앞에서 너무 고개쳐들고 뻣뻣하게 있다. 어이가 없다. 허허. 삶을 깨트리고 말씀 앞에 기준을 두어 매일, 매순간을 보낼 수 있길 기도한다.
그렇게 내가 살아나서 다른 죽어가는 이들을 회복시켜야만 한다. 내가 머무르고 있는 곳,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자들이 되길, 그런 곳이 되길 내가 그곳에서 선포하며 나아가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높아지는 때를 기대한다. 오리무중인 인사 결정과 답답한 상황이 생겨나서 그렇찮아도 별로였는데 작은 기대나 끄나풀마저도 없어보이는 소망없는 시간이 흐르고 있다. 그래서 모두가 아니라고 말하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곳은 하나님의 소유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해야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더디게라도 회복되어 그 날이 다시 올 것이 막연한 기대인 것 같지만 막연하지 않음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다.
기도하며 준비하여 나를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는, 살아내는 삶이 되길 기도한다.
7 천사들에 관해서는 성경에 이르기를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바람으로 삼으시고, 시중꾼들을 불꽃으로 삼으신다." 하였고,
8-12 아들에 관해서는 성경에 이르기를 "하나님, 주님의 보좌는 영원무궁하며, 공의의 막대기는 곧 주님의 왕권입니다. 주님께서는 정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곧 주님의 하나님께서는 주님께 즐거움의 기름을 부으셔서, 주님을 주님의 동료들 위에 높이 올리셨습니다." 하였습니다. 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태초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하늘은 주님의 손으로 지으신 것입니다. 그것들은 없어질지라도, 주님께서는 영원히 존재하십니다. 그것들은 다 옷처럼 낡을 것이요, 주님께서는 그것들을 두루마기처럼 말아 치우실 것이며, 그것들이 다 옷처럼 변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언제나 같으시고, 주님의 세월은 끝남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 역할을 하던 천사들과의 차이를 구약의 기록을 근거로 말하고 있다. 시중드는 천사들과 아들이신 예수님을 비교? 비교자체가 안된다. 그냥 단순히 위에서부터 온 분이 아닌 것이다. 뭐 진짜 절대 대체불가, 예수님은 어나더레벨이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아들, 이 아들을 세상의 주인, 하나님의 본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만물을 보존하고 창조하신 분, 우리 죄를 속량하시고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신 분, 그래서 계속 역사하시는 분으로 소개한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죽기까지 순종한 아들은 결국 하나님의 공의하심으로 가장 귀하고 높은 곳에 앉으셔서 지금도 우리를 살피고 있으시다.
우리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이 땅에 가장 작은, 낮은 자로 성육신하셔서 십자가의 조롱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은 아들. 이 아들의 부활로 소망이 생겼고, 이분이야말로 그리스도라는 것을 뒤늦게 혹은 그 역사 후에 알고 신앙하였지만 여전히 변함없이 세상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반복되는 일상 앞에서 흔들린다. 정말 이 분이 나의 구원자가 맞으신가. 라는 고민과 갈등으로 흔들리던 시대였단다. 지금과 다를 바없이.
물질이 나를 풍요롭게 하는 것 같은 시대의 흐름이지만 그것이 절대 우리를 풍요롭게 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시대 속에 살고 있다. 그 공허함으로 신기하게 나의 존재를 다시 돌아보게 되고, 신을 찾게 된다. 갈구한다. 근거도 없이 믿음도 없이 그냥 막연하게. 개인의 채움을 위해 애를 쓰지만 그 목적과 방향이 기독교 가치와는 다르기에 당연히 개인의 필요가 쉽사리 채워지지 않아서 떠나고 돌아옴을 반복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추구해야하는 것일까. 예수님이 소개되는 이 1장에서 세 가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1. 나는 예수님을 어떻게 고백하고 신뢰하며 나의 주라 일컫고 있는가?
죄의 노예가 되어 죽음의 길을 걷고 있는 것만 같으나 그럼에도 여전히 예수가 나를 대신하여 이미 구속해주셨기에 나는 비루하지만 생명의 길 위에 있음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나는 죄가 아니라 주께 속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리고 십자가 단 한 번의 역사로 마무리 하신 게 아니라 여전히 하늘 보좌 우편에서 날 위해 끊임없이 중보하고 있으신 살아계신 주님이시다. 그 주님이 나의 주님이시기에 평안할 수 밖에.
2. 나의 예수님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사셨는가?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르게 사셨다. (물론, 말씀이 육신이되신 하나님이시니 당연하다.) 죽기까지 끝까지 하나님 앞에 순종했다. 그 끝에 하나님은 아들을 가장 영광스럽게 하셨다.
3. 예수님을 나의 주라 말하는 나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내 주님으로 인해 평화와 안식만 누리며 안일하게 내 배만 두들기며 있어서는 안된다. 그렇기에 공동체에서 하나님을 바르게 신앙하는 것을 말하지만, 나는 여전히 내 배만 뚠뚠하게 채우고 있는 아이러니한 반전의 모습을 갖고 있다. 삶이 죽어있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 반복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내가 잘못 가고 있다는 걸 자각한다. 그래서 다시 돌아오려고 발버둥치려한다. 요즘 나는 반응 속도가 상당히 느리다. 하나님 앞에 있는 시간이 현저히 적은 탓이다. 이젠 다시 돌아가 매순간 즉각적인 반응이 내게 있길 바란다. 나의 주님, 나의 사랑하는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듯 나도 하나님 앞에 교만하지 않은 순종이 필요하다. 요즘 나는 무슨 배짱인지 하나님 앞에서 너무 고개쳐들고 뻣뻣하게 있다. 어이가 없다. 허허. 삶을 깨트리고 말씀 앞에 기준을 두어 매일, 매순간을 보낼 수 있길 기도한다.
그렇게 내가 살아나서 다른 죽어가는 이들을 회복시켜야만 한다. 내가 머무르고 있는 곳,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자들이 되길, 그런 곳이 되길 내가 그곳에서 선포하며 나아가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높아지는 때를 기대한다. 오리무중인 인사 결정과 답답한 상황이 생겨나서 그렇찮아도 별로였는데 작은 기대나 끄나풀마저도 없어보이는 소망없는 시간이 흐르고 있다. 그래서 모두가 아니라고 말하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곳은 하나님의 소유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해야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더디게라도 회복되어 그 날이 다시 올 것이 막연한 기대인 것 같지만 막연하지 않음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다.
기도하며 준비하여 나를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는, 살아내는 삶이 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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