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말씀과 마주하다
로마서 4장 2)
사랑스러운_
2017. 9. 18. 02:37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창세기 15:6 새번역)
할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또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걸어간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사람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4:12)
아브라함이나 그 자손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 곧 그들이 세상을 물려받을 상속자가 되리라는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로마서 4:13)
그가 믿은 하나님, 다시 말하면,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며 없는 것들을 불러내어 있는 것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보장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면서 믿었으므로 "너의 자손이 이와 같이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4:17-18 새번역)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믿음이 굳세어져서 하나님께 열광을 돌렸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속하신 바를 능히 이루실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여겨 주셨습니다." (로마서 4:19-22 새번역)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실 우리, 곧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을 믿는 우리까지도 위한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 (로마서4:21-22 새번역)
유대인은 할례를 받은 자신들만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방인에게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간다는 것을 부인했었나? 그랬겠지..) 이들의 이러한 생각에 반향을 불러오는 이야기를 바울은 전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계획하신 것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할례가 먼저가 아니라, 믿음이 먼저였다. 그렇기에 유대인 뿐 아니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할례받지 않은 상태에서 묵묵히 믿음을 고백하고 걸어간 그 발자취를 따라가는 자들의 조상이 되었다. (4:12)
아브라함의 믿음은 절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자신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은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내려놓고 나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것이었으며,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었다. 이 믿음을 하나님께서 의로 여겨주셨다.
나는 믿음의 발자취를 남기며 걸어가고 있는가? 먼저 믿게 하신 것은 이를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북돋아주는 공동체를 이루며 이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먼저 믿은 자의 삶은 더욱 더 표리부동한 상태이다. 습관적이게 되고, 타성에 젖어 아무런 움직임도 아무런 반응도 없다. 행위만 보이려 한다. 마치 가인의 제사와 같지 않은가. ㅠㅠ
내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시간이 거듭될수록 더 윤리적인 (나도 윤리적이지 않으면서) 잣대만 들이대려고 하며, 그동안의 신앙의 행적들로부터 얻은 관습적인 (혹은 율법적으로) 신앙을 보이려하진 않았나 돌아본다.
말씀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율법은 우리를 자유하게 할 수 없으며 죄의 굴레에 갇혀 헤어나오지 못하게 하며, 오히려 더 큰 진노를 불러오게 된다고.
그렇다. 정말 그렇다. 율법적인 잣대에서는 나는 정말 조금도 의인으로 칭함 받을 수 없으며 불손하고 불량하고 불결한 존재가 될 뿐이다. 더 내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게 될 뿐 아니라 이것이 삶을 살아나게 하지 못하고 죽은 것과 같이 무기력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나에게 생명을 허락하시고 영원히 당신과 교제하며 매일을 생기있게 살아가게 하신다. 구원의 즐거움과 기쁨에 충만하게 있게 하신다. 결코 의로운 존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보혈과 부활을 믿음으로 고백할 때 의롭게 하신다.
이렇게 거저 받았는데 우리는 서로를 율법의 잣대로 겨냥하는 경향이 있다. 나를 살리신 하나님을 기억할 때, 이런 행위 자체가 정말 부끄럽게 여겨지지 않을 수 없다. 알게 모르게 정죄하고 있었던 나를 돌아보게 한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의인이 악인이 될 수도, 악인이 의인이 될 수도 있다. 미개한 창조물인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관점이다. 사람의 관점을 걷어버리고 하나님의 눈을 입은 자가 되고 싶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정말 애처롭게 바라보는 자를 볼 수 있는 눈이길 원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해하시고 받으시고 의롭다고 하신 것처럼 내 주변을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아주 조금이라도 이들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지금과 같이 낙심하는 경우는 없으리라.
인간을 기대하고 의지하는 것을 자꾸 걷어 내시려는 하나님의 일하심 속에서 일년을 보내고 있는 내가 이제는 하나님을 더욱 더 의지하고 기대하며 나아가길. 의미없는 다짐이 되지않길. 내일은 더 사랑이 넘쳐나길.
할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또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걸어간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사람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4:12)
아브라함이나 그 자손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 곧 그들이 세상을 물려받을 상속자가 되리라는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로마서 4:13)
그가 믿은 하나님, 다시 말하면,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며 없는 것들을 불러내어 있는 것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보장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면서 믿었으므로 "너의 자손이 이와 같이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4:17-18 새번역)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믿음이 굳세어져서 하나님께 열광을 돌렸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속하신 바를 능히 이루실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여겨 주셨습니다." (로마서 4:19-22 새번역)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실 우리, 곧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을 믿는 우리까지도 위한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 (로마서4:21-22 새번역)
유대인은 할례를 받은 자신들만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방인에게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간다는 것을 부인했었나? 그랬겠지..) 이들의 이러한 생각에 반향을 불러오는 이야기를 바울은 전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계획하신 것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할례가 먼저가 아니라, 믿음이 먼저였다. 그렇기에 유대인 뿐 아니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할례받지 않은 상태에서 묵묵히 믿음을 고백하고 걸어간 그 발자취를 따라가는 자들의 조상이 되었다. (4:12)
아브라함의 믿음은 절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자신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은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내려놓고 나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것이었으며,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었다. 이 믿음을 하나님께서 의로 여겨주셨다.
나는 믿음의 발자취를 남기며 걸어가고 있는가? 먼저 믿게 하신 것은 이를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북돋아주는 공동체를 이루며 이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먼저 믿은 자의 삶은 더욱 더 표리부동한 상태이다. 습관적이게 되고, 타성에 젖어 아무런 움직임도 아무런 반응도 없다. 행위만 보이려 한다. 마치 가인의 제사와 같지 않은가. ㅠㅠ
내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시간이 거듭될수록 더 윤리적인 (나도 윤리적이지 않으면서) 잣대만 들이대려고 하며, 그동안의 신앙의 행적들로부터 얻은 관습적인 (혹은 율법적으로) 신앙을 보이려하진 않았나 돌아본다.
말씀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율법은 우리를 자유하게 할 수 없으며 죄의 굴레에 갇혀 헤어나오지 못하게 하며, 오히려 더 큰 진노를 불러오게 된다고.
그렇다. 정말 그렇다. 율법적인 잣대에서는 나는 정말 조금도 의인으로 칭함 받을 수 없으며 불손하고 불량하고 불결한 존재가 될 뿐이다. 더 내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게 될 뿐 아니라 이것이 삶을 살아나게 하지 못하고 죽은 것과 같이 무기력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나에게 생명을 허락하시고 영원히 당신과 교제하며 매일을 생기있게 살아가게 하신다. 구원의 즐거움과 기쁨에 충만하게 있게 하신다. 결코 의로운 존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보혈과 부활을 믿음으로 고백할 때 의롭게 하신다.
이렇게 거저 받았는데 우리는 서로를 율법의 잣대로 겨냥하는 경향이 있다. 나를 살리신 하나님을 기억할 때, 이런 행위 자체가 정말 부끄럽게 여겨지지 않을 수 없다. 알게 모르게 정죄하고 있었던 나를 돌아보게 한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의인이 악인이 될 수도, 악인이 의인이 될 수도 있다. 미개한 창조물인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관점이다. 사람의 관점을 걷어버리고 하나님의 눈을 입은 자가 되고 싶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정말 애처롭게 바라보는 자를 볼 수 있는 눈이길 원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해하시고 받으시고 의롭다고 하신 것처럼 내 주변을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아주 조금이라도 이들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지금과 같이 낙심하는 경우는 없으리라.
인간을 기대하고 의지하는 것을 자꾸 걷어 내시려는 하나님의 일하심 속에서 일년을 보내고 있는 내가 이제는 하나님을 더욱 더 의지하고 기대하며 나아가길. 의미없는 다짐이 되지않길. 내일은 더 사랑이 넘쳐나길.